이순신 장군 노량해전 전사 미스테리, 실제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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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노량해전 전사 미스테리

이순신 장군의 영화 노량:죽음의바다가 12월 20일 개봉합니다. 이 영화는 노량해전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인데,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하신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였죠. 그런데, 항간에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게 아니라는 의혹도 많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증거가 미약하며, 정황상 말이 안 되는 부분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 전사 미스테리에 대해서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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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여러 장수들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고 정황상 어떤 이유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왜 이렇게 됐는지를 설명합니다.

노량 격전지 현대지도에서 3
노량해전 실제 격전지 지도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는 의혹은 듣고 보면 참 그럴싸하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명확합니다. 물론 증거가 없고 정황상 이유이지만 말이죠. 그 이유는 아래와 같이 정리가 됩니다.

  1. 조선 수군이 올린 장계와, 명나라 진린 장군이 올린 편지 내용에서 이순신 장군 전사 시간이 일치하지 않는다.
  2. 전투가 진행된 4~7시간 동안 총사령관의 부재를 아무도 몰랐다?
  3. 전사했다고 알려진 이후 16년뒤에 장군의 묘를 고작 600m 떨어진 장소로 이장했다.
  4. 덕수이씨 족보에는 이순신 장군이 16년 뒤인 1604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는 이유 입니다. 저 이유들이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노량해전 실제 위치 보러가기

이 글을 보기 전 노량해전에 대한 글을 포스팅 해두었으니 영화를 보기 전에 기본 지식으로 위 링크의 포스팅을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노량해전의 전투 시간은 최장 7시간이었음. 그런데 아무도 몰랐다?

당시 조선의 대장선에는 언제나 사령관을 지키는 병사들이 사령관 주변에 90명 가량 탑승해 있었고 사령관의 부관들도 항시 전투태세를 갖추고 사령관 옆에 있었음.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총에 맞고 전사한 사실을 오로지 아들 이희와 조카 이완 두 사람만 알았다? 그것도 전투 중이었던 때에..?

방패병
사령관의 주변을 감싸는 방패병

✔정황상 무언가 말이 안되는 것이다.

노량해전은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소탕전이었고, 전투가 최장 7시간동안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사령관의 부재를 소수 인원 외에 아무도 몰랐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게다가 다른 해전도 아닌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셨다는 것은 더욱이 말이 안되는 것이다.

당시 사망자만 따져봐도 왜놈은 거의 전멸, 조명 연합군의 사망자는 약 28000명 중 500명이 채 안되는 만큼 압도적으로 승리한 전투인데, 이 500명 중에 이순신 장군이 껴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노량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 뿐만 아니라 이영남 가리포첨사, 방덕룡 낙안군수, 이언량 초계군수, 고득장 흥양현감 등 이순신 장군의 측근들도 전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압도적으로 승리한 노량해전에서 사령관과 장수들이 이렇게 많이 전사했다고?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는데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전사한 것으로 꾸몄다 라는 정황상 증거 임.

이순신 장군의 사망 시간은 새벽 2시경인데, 진린의 편지에는 동틀 무렵이라고 적혀있다. 새벽 2시는 가장 어두운 시간으로서, 사실을 은폐하기에 좋은 시간대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를 꾸미고 잠적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국장으로 치뤄진 장례인데, 16년 뒤 이장했다?

이순신 장군의 사망은 11월 23일 선조에게 보고되었고 12월 4일에 좌의정으로 증직, 장례는 국장으로 치뤄집니다. 그런데 국장으로 치뤄진 장례인데 16년뒤에 고작 600m 옆으로 이장했다? 라는것이 사실 말이 안됩니다.

국장이란 것은 나라에서 묫자리를 정해주고 장례를 치룬 것인데 갑자기 묫자리가 바뀌었다는 것은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산 이충무공묘
아산 이충무공묘

사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 이후에도 생존해 있었으며 16년 뒤 자연사 함으로써, 가족들끼리 따로 장례를 치루고 묘를 이장하는 형식으로 다시 만들었다고 보는게 맞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덕수이씨 족보에는 16년 뒤에 사망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니(진위 여부는 불명확) 이 부분에 대한 조사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 이후 잠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만약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는데도, 전사 한 것으로 꾸며지고 잠적했다면 그 이유는 어떤게 있을까요? 저 때 당시 선조가 했던 짓을 보면 이순신 장군은 잠적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일본이 쳐들어온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나라가 피폐해졌음에도 똘방구 선조는 도망치기에 바빴고, 나라를 구한 것은 일부 장수들과 의병대 였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선조는 의병대 대장들을 어떻게 했을까요?

선조 어진
희대의 똘방구 선조

선조는 전쟁이 끝날 때 즈음, 혹은 끝난 후 각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의병대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여러 의병대장들을 역모죄로 참수했습니다. 한 마디로 의심병자였죠.

이순신 장군은 이런 선조의 의심병을 미리 알고 있으며, 종전 후 자신이 선택할 길이 죽음(에 가까운 모욕)이거나 역모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충심을 가장 중요시하는 이순신 장군이 역모를 꾸밀 수는 없었을테고, 그렇다고 그냥 죽는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이순신 장군이 자살을 한 것이다 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제가 생각해도 이는 억지에 가깝습니다. 정유재란이 끝났지만, 이후 일본이 다시 침략할 수도 있는 불분명한 상황에서 자살이라는건 말이 안됩니다. 이보다는 전사로 꾸민 뒤 생존해 계시면서 일본의 재침략을 대비하고 계셨다 라고 보는게 옳다고 생각됩니다.

✔선조의 의심병으로 인해 이순신 장군은 스스로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꾸미고 잠적한 것 입니다.

이후 명나라로 되돌아간 진린의 행동도 이에 맞습니다. 진린은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을 천거하며 요동 방비를 맡기자고 말하기도 했는데, 죽은 사람에게 요동을 맡기자고 하는게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선조는 이순신 장군의 생존을 알고 있었다?

✔선조 입장에서 이순신 장군은 가장 두려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같은 이씨 가문이면서도 실제로 권력을 잡고자 한다면 왕을 밀어내고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순신 장군이 스스로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고 말하고 잠적했다? 선조 입장에서는 땡큐인 것이지요.

게다가 진린이 이미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서신을 올렸기에 전쟁 이후에 이순신 장군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스스로 잠적한다고 하니 선조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글을 마치면서

✔ 이 모든 것은 증거가 없는 픽션 입니다.

이런 카더라~ 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이 글을 씁니다. 사실 많은 역사학자들도 노량해전 이순신 장군 전사에 대해서는 많은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뭐, 과거로 되돌아가서 왜 이랬냐고 알아볼 수도 없고 답이 없죠.

이순신 장군의 종가집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생전에 쓰신 난중일기의 후속편? 같은게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까지 공개를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뭐.. 없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를 담은 노량:죽음의바다 가 굉장히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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