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 명나라 진린 장군은 실제로 탐욕스럽고 나쁜 사람이었을까?

명나라 진린
명나라 장군 진린에 대하여

2023년 12월 20일 노량:죽음의바다 가 개봉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명나라 장군 진린이 등장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실제 진린의 모습은 조금 다를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오기에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린은 일본에게 뇌물도 받고 전투에도 소극적으로 임하는 바람에 왜놈들을 다 잡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는데요, 실제로는 아니라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명나라 진린 장군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정재영 진린2
노량 죽음의바다에서 나오는 진린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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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린 장군은 실제로 강경파였다?

진린 장군에 대한 조선 조정과 이순신 장군의 입장은 다소 달랐던 것으로 나옵니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 의하면 조선 조정의 대신들이

‘통제공이 진린의 횡포를 가만히 놔돌 리가 없고, 분명 명나라 군대와 갈등이 생길테니 패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라며 우려를 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이런 진린의 성격을 미리 파악하고 대처함으로써 오히려 진린의 인심을 샀고, 진린과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고 합니다.

✔ 진린은 실제로 포악했을까요? 아닐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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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진린 장군의 시조

이순신 장군을 만나기 전 진린은 조선 관리 이상규를 폭행하고, 그의 목에 밧줄을 묶은 후 말에 매달아 죽기 전까지 끌고 다녔다는 썰이 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조선의 관리들이 대부분 다 정상이 아닌 사람들이었으며 저 일이 왜 벌어졌는지에 대한 전후 사정을 알 수 없으니 행위만 보고 포악했다 라고 평가하기는 무리수가 있습니다.

✔ 어쨌든 진린은 실제로 전투를 머뭇거리기 보다는 왜놈들을 적극적으로 토벌한 강경파였습니다.

명나라 입장에서 봤을 때 임진왜란, 정유재란은 모두 남의 나라 전쟁이었으니비록 이후 명나라에게 미칠 영향 등이 있겠지만) 전투에 소극적인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명나라 장수들이나 병사들도 남의 나라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것은 개죽음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진린은 결과적으로 노량해전에 참전함으로써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섰습니다. 등자룡이라는 명나라 장수도 전투 중 전사했을 정도였으니 진린이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라는 말은 무리가 있습니다.

✔ 진린이 왜놈들에게 뇌물을 받은 것은 맞지만 이것 또한 전략적 행보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린은 뇌물을 받은 직후 이순신에게 곧바로 이 사실을 알리며 대책을 의논했습니다. 이 뇌물을 받더라도 약속대로 움직이지만 않은다면 오히려 왜놈들의 허를 찌를 수 있으니 어찌보면 전략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역사적 사실이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진린에 대한 평가가 일방적인것은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명나라가 조선을 도우러 와준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때 당시 명나라의 국력 자체도 그리 좋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남의 나라 전쟁을 도우러 와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전쟁은 애들 장난이 아니라 목숨이 달린 일인데 말입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후 진린의 행보

진린은 명나라로 돌아가서는 1597~8년 양응룡의 반란을 진압했고 1605년에도 산묘를 토벌, 이후 광동성을 진무하고 관직을 마쳤습니다. 1607년에 세상을 떴는데 이후 시호로 충강(忠康)을 받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조선을 지켰듯이 진린 장군도 어려운 명나라를 온 몸으로 지켜낸 명나라의 충신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진린의 자손들 역시 명나라가 망해가고 청나라가 흥하던 난세 속에서 외적인 청나라와 끝까지 대적했습니다.

진린의 아들 진구경은 1646년 애산에서 청군과 싸우다가 전사했고, 진구경의 아들 진영소(진린의 손자)는 명나라가 1644년에 멸망하고 얼마 뒤 애산에서 진구경의 비보를 접하고는 식솔들을 데리고 해남에 정착해 조선에 귀화했습니다.

지금도 진영소의 후손들은 광동을 본관으로 하고 진린을 시지로 모시는 광동 진씨가 되었다고 합니다. 광동 진씨들은 진린의 후손들인 것이죠.

전남 완도군과 광동진씨추진위원회
전남 완도군과 광동진씨추진위원회

진린이 조선을 지킨 장수가 아니었다면, 이들이 조선에 귀화할 수 있었을까요? 진린 장군이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전쟁이 소극적인 장수는 아니었던게 아닐까요?

진린 장군과 이순신 장군의 관계를 통해 광동 진씨는 이순신 가문인 덕수 이씨와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 중국의 본토에 남아 있는 광동진씨와도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하네요.

광동 진씨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광동진씨 카페에 가보시면 좋겠습니다.


광동진씨 카페 가기

명나라 진린 장군 글을 마치며 –

✔역사란 알면 알수록 새롭습니다.

저도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진린 장군이 그저 뇌물을 받고 조선인을 괴롭히고 전쟁에 소극적인 장수였다 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닐 가능성도 있다고 하니 참 새롭습니다.

사실 제가 진린 장군이었으면 그냥 선조 머가리를 따버리고 조선을 포기했을 수도 있었겠다 싶습니다. 저 때 당시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 말고는 딱히 제대로 된 관리도 없었을 뿐더러 특히 왕인 선조의 머가리는 큰 문제가 있었으니 명나라 입장에서 돕고 싶었을까요?

전쟁에 참전해 준 것 만으로도 큰 도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 한다는게 참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지금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돈과 무기만 보내는데도 그렇게 질색팔색을 하는데, 실제 목숨이 달린 병력을 보낸다 라는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는 외국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은 듯 합니다. 조선에서 명나라 군대도 그렇고, 6.25때 UN군도 그렇고 말이죠.

현재는 대한민국이 글로벌 경제 순위 10위권 안에 드는 국가인데 다른 국가들을 도와주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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