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봄 쿠데타에 끝까지 맞선 장태완 장군의 결말은?

이태신 결말 1
장태완 장군의 결말

서울의봄 영화의 주인공 정우성 배우가 한 역할 이태신의 실존인물 장태완 장군은 영화 이후 어떤 결말을 맞이했을까요? 영화에서는 고문 등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다행히 장태완 장군은 죽지 않고 후에 국회의원까지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장태완 장군의 가족들은 꽤 비참한 삶을 살다가 떠나게 되는데요, 이제부터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울의봄 실명 안 쓴 이유, 못 쓴 이유 >

<서울의봄 실명 안 쓴 이유, 못 쓴 이유 >

<서울의봄 김의성 실존인물인 노재현 국방장관의 결말>

<서울의봄과 비슷한 영화 추천 >

< 서울의봄 김성균 실존인물 김진기 헌병감 결말 >

<서울의봄 이태신 실존인물 장태완 소장 결말 >

<서울의봄 정만식 실존인물 정병주 소장 결말>

<서울의봄 최병모 실존인물 박희도 준장 결말 >

< 서울의봄 최병모 실존인물 박희도 준장의 섬뜩한 최근 행보 >

<서울의봄 등장인물 군대 계급 정리>


장태완 실제사진
(故)장태완 장군님 실제 모습

✔ 장태완 장군의 삶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12.12쿠데타 이후 장태완 장군은 어떻게 됐을까


12.12쿠데타에 끝까지 맞서 싸우던 장태완 사령관은 수도경비사령관에서 해임되고 이후 서빙고에서 45일간 각종 고문과(고문한 사람들 아직도 살아 있을까, 사죄하길) 모진 협박을 당하다가 45일만에 쫒겨났습니다.

이후 6개월 간 자택에 강제로 연금 되었으며 이등병으로 예편되었습니다.

장태완 본인도 고통이었지만 가족들은 더한 일을 겪었습니다.

아버지“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한탄하고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가 결국 1980년 4월 과음으로 별세
외동아들 장성호 (당시 21세)서울대 자연과학대에 수석으로 입학한 아들은 등교 중 행방불명, 이후 한 달 만에 칠곡군 왜관읍 근처에 있는 산기슭에서 시체로 발견.
부인장태완 장군이 별세하신 후 따라서 자살로 생을 마감.
장태완 장군 가족의 비극사

전두환 정부 시절의 장태완


이태신 정우성 1
실존인물 장태완 역의 정우성

장태완 장군은 아들과 아버지를 잃은 후 자기자신을 탓하며 전국을 유랑했습니다. 이후 전두환이 장태완을 공기업인 한국증권전산 사장에 임명하자 이를 수락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장태완 장군이 전두환에게서 떡고물을 받아 먹은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지만 잘못된 이야기 입니다.

장태완 장군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이 죽고 딸만 남게 되자, 딸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라고 보는게 옳습니다.

이후 1989년 사장에서 회장으로 추대됐다고 95년부터는 건설사 르메이에르 회장직을 맡았습니다.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르메이에르는 직원 폭행,학대로 유명해진 건설사인데 물론 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민주정권 이후의 장태완


품절인 쿠데타와나
장태완 장군이 집필한 12.12쿠데타와 나

1993년이 오자 12.12쿠데타와 나 라는 회고록을 집필했는데 현재는 절판되어 구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국회도서관 국회전자도서관에서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링크를 걸어 놓았으니 아래 12.12쿠데타와 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국회전자도서관으로 이동합니다.




책 발간 후 1994년 대한민국재향군인회 경선에서 승리한 후 2회 연속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에 당선되었습니다. 6.25까지 참전하신 분이니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후 1996년 김영삼 정권이 12.12군사반란과 5.17내란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재판을 열자 증인으로 채택되어 두 사람과 마주보기도 했습니다. 이 때 증언을 마친 후

“한때는 함께 국방에 열심을 다하던 입장이었는데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소”

라며 입장이 바뀐 처지를 일깨우는 뼈 있는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이 재판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모두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둘 다 사형은 개뿔 잘 쳐먹고 잘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특히 문어대가리는 오래도 살았죠.


2000년 이후 정치활동 및 사망


2000년 새천년민주당(현 민주당의 전신)의 인재 영입에 따라 비례대표로 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당선이 되자 386세대 국회의원들을 만나 “12.12쿠데타를 내가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새천년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임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 등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고 2002년 6월 북한 경비정이 NLL을 침범하자 평상시에 기동 훈련이 부족했던 것 아니냐며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또 국가보안법 폐지에도 부정적 입장이었죠. 이처럼 당에 소속되어 있음에도 자신의 소신에 따라 비판할 것은 비판한 인물이었습니다.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보훈특보를 맡기도 했는데요,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탁핵을 당할 때 찬성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고 은퇴 했으며 2010년 별세할 때까지 민주당 고문직을 맡았습니다.

박정희 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기도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하나회를 비호한 것이 12.12쿠데타의 원인이라면서 박정희를 비판하기도 했죠. 할 말은 하는 인사였습니다.

2010년 7월 26일 78세에 숙환으로 사망하시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 되셨습니다.


글을 마치며-


✔ 죽어서도 칭송 받는 자와, 죽어서도 욕 먹는 자의 차이

사람은 살면서 비루한 것들에게 욕심을 내기도 하고, 못된 짓을 하기도 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모두 인간의 삶은 짧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짓이겠죠. 사람은 짧은 생을 살다가 죽기 마련이고, 살아 있는 세월 보다는 죽은 이후의 기록이 훨씬 더 오래 남습니다.

죽어서도 욕을 먹는 인간들이 있는 반면 죽어서도 칭송 받는 분들이 계시죠. 살아가면서 죽어서도 욕 먹을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 라는걸 모두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Leave a Comment